구역공과&쉴만한 물가
2019년 6월 셋째 주 구역공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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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기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섭리 -느헤미야 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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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배/ 순/ 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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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
한 주간 읽을 성경 말씀: 느헤미야 1-4장 |
환영/ [지난주 말씀 나눔]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는가? 찬송/ 301(460) 기도/ 구역원 중 말씀속으로/ 헌금찬송/ 302(408) 주기도문/ 다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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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눔] 지난 주 말씀 가운데 혹은 살면서 깨달은 것, 회개, 감사, 결단한 것들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 어떻게 살 것인가?(갈 5: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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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해]
느헤미야서는 에스라서와 함께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의 재건과 회복을 주제로 한다. 에스라서가 성전 재건과 정체성 확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느헤미야서는 성벽 재건과 공동체 회복에 관심을 기울인다. 에스라서가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겸 서기관 에스라를 중심인물로 소개한다면, 느헤미야서에서는 총독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다.
[말씀 깨닫기]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팀이 약팀에게 지고, 우승 후보가 예선전에서 탈락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보다 더 예기치 못하게 움직이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 쓰시는 구원의 드라마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느헤미야 1장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1.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을 시작하신다_ 유다가 망하고(주전 586년) 약 50년 뒤인 주전 538년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포로 중 약 5만 명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 1차 포로귀환이다. 와서 성전을 재건한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 후 80년이 지난 주전 458년에 에스라에 의해 두 번째 포로귀환이 일어난다. 첫 번째 온 사람들에 의해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다시 우상을 섬기는 민족들과 혼인하고, 다시 타락해 있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말씀에 기초한 영적 대각성을 일으킨다. 그다음에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려면 울타리를 쳐야 했다. 그래서 성벽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12년가량 흘렀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1,000km 떨어진 곳에 있는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에서 일을 시작하신다. 한 사람 느헤미야에게 감동을 주신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방문한 친척들로부터 예루살렘이 폐허라는 소식을 듣고, 그 마음에 불이 붙는다(2-3절).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어느 곳에선가 일하신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질문] 하나니에게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어떻게 하는가? (4절)
2.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한다_ 하나님의 일하심과 감동은 느헤미야를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어떻게 표현되는가?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 기도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6-7절) ② 주의 백성임을 기억하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10절) ③ 나를 사용하여 주소서.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11절) 하나님의 일하심은 느헤미야의 기도로 표현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늘 기도가 먼저 터져 나온다. 기도의 부흥, 기도의 몸부림이 수반된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능력도 없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게 매달려, 무릎 꿇는 것밖에 없다. 용서해 주시고,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섭리는 시작된다. 혹시 하나님이 간절한 소원을 주셨는가? 감동을 주셨는가? 그런데 자신은 능력이 전혀 없고, 형편도 안 되는가? 그 감동과 소원을 묻어두지 마시고, 기도의 자리에서 터뜨리시면, 역사가 일어난다.
질문] 느헤미야가 어떤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5절)
3.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_ 1장은 이런 말로 끝이 난다.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11절)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조짐이 보인다. 느헤미야가 소위 왕의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위한 일의 시작이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한 인물 느헤미야를 택해서, 세우시는 것으로 하나님은 성벽 재건의 첫 삽을 뜨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분열되어 있다. 오래 묵은 정치적 갈등부터 시작해서, 세대 간 갈등, 빈부 간 갈등, 노사 간 갈등, 갈등의 소리만 들린다. 한국교회도 안타까운 소식만 들린다. 교회가 분열되고, 반대로 기도는 식고, 예배는 힘이 없어진다. 개인과 가정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 이 나라, 한국교회에 속한 자들이다. 나라와 교회가 어려우면 우리 개인과 가정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희망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가?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하신다. 여전히 하나님은 현대판 느헤미야를 찾고, 세우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헤미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현실을 비추어보고, 금식하며, 울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나를 사용해달라고, 내 기도를 사용해 달라고, 우리 가정과 자녀와 교회를 사용해 달라고, 매달려야 한다. 그 간절함, 그 믿음, 그 기도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재료로 사용된다. 느헤미야는 술 관원이 되게 해달라고 정해 놓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저 울고, 형통하게 해달라고,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매달렸을 뿐이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우리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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